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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및 선사유적
동강의 자연분포현황을 알려드립니다.
민속놀이
영월 문산농악
영월 지방의 대표적인 농악으로 지금도 문산 2리 마을에서 전승되고 있다.
문산 농악의 유래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조 6대 임금인 단종대왕이 죽자 그 혼령이 태백산 산신령이 되기 위하여 황쏘가리로 변해 남한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 가던 중 어라연이라는 경치가 좋은 곳에서 머물고 갔다.
어라연 상류인 문산리에 사는 주민들은 이와 같은 전설에 따라 단종대왕의 혼령인 어라연 용왕을 모시는 용왕굿을 하며 모든 재앙으로부터 주민들이 해를 입지 않기를 기원했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다. 이러한 굿은 오랜 시간이 흐르며 마을 전 주민이 참여하는 대동놀이로 발전하여 맥을 이어오고 있다.
문산 농악의 구성은 행진, 인사굿, 마당 닦기, 멍석말이, 태극 그리기, 십자오방진, 법고 놀이, 무동 놀이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 때 사용되는 가락은 인사 굿가락, 3채 가락, 자진 가락, 3채 길굿가락, 굿거리 가락이 쓰여진다.
문산 농악의 가락이 다른 지역의 가락과 다른 점은 징과 북을 한 점 더 친다는 것이다.
문산 농악의 유래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조 6대 임금인 단종대왕이 죽자 그 혼령이 태백산 산신령이 되기 위하여 황쏘가리로 변해 남한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 가던 중 어라연이라는 경치가 좋은 곳에서 머물고 갔다.
어라연 상류인 문산리에 사는 주민들은 이와 같은 전설에 따라 단종대왕의 혼령인 어라연 용왕을 모시는 용왕굿을 하며 모든 재앙으로부터 주민들이 해를 입지 않기를 기원했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다. 이러한 굿은 오랜 시간이 흐르며 마을 전 주민이 참여하는 대동놀이로 발전하여 맥을 이어오고 있다.
문산 농악의 구성은 행진, 인사굿, 마당 닦기, 멍석말이, 태극 그리기, 십자오방진, 법고 놀이, 무동 놀이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 때 사용되는 가락은 인사 굿가락, 3채 가락, 자진 가락, 3채 길굿가락, 굿거리 가락이 쓰여진다.
문산 농악의 가락이 다른 지역의 가락과 다른 점은 징과 북을 한 점 더 친다는 것이다.
정선 고성산성제(강원도 기념물 제68호)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고방 마을 앞산에 있는 고성리 산성(강원도 기념물 제 68호)은 삼국시대 한강 상류를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쌓은 것으로 추측되는 성이다. 해발 4백여미터의 야트막한 산에 쌓은 이 성은 성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고 굽이 흐르는 동강의 아름다움을 잘 관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성리 산성 주변 마을 주민들은 1993년 부터 고성산성 보존회를 구성하여 매년 여름 또는 가을에 전통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지역 주민들의 자긍심과 애향심 고취를 위해 '고성 산성제'를 열고 있다.
고성리 산성 주변 마을 주민들은 1993년 부터 고성산성 보존회를 구성하여 매년 여름 또는 가을에 전통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지역 주민들의 자긍심과 애향심 고취를 위해 '고성 산성제'를 열고 있다.
정선 운치리 섶다리 놓기
정선군 신동읍 운치 2리 수동과 번들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11월이면 두 마을 한 가운데로 흐르는 강에 섶다리를 놓고 마을 잔치를 벌인다. 섶다리는 나룻배로 오가기 힘든 겨울을 나기 위해 놓는 다리로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큰물이 나면 떠내려가는 다리로 이 마을에서 수백 년 째 놓아왔다.
다리를 놓기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교각으로 쓰이는 다릿발 등의 나무를 한다. 이들 나무들의 이름 또한 특이한데, 다릿발을 연결해 고정시키는데 쓰이는 나무를 '머그미'라고 하며, 상판에 해당하는 길고 굵은 나무를 '열모'라고 한다.
섶다리를 놓는데는 먼저 배를 상류에 줄로 매어 놓고 Y자 형태의 다릿발을 먼저 세운다. 그리고 그 위에 길이가 약 1m 정도로 양쪽 끝에 홈을 판 머그미를 얹고 그 홈에다가 다릿발을 끼워 움직이지 않게 나무 쐐기를 박는다.
강을 낀 마을 사람들은 양쪽에서부터 교각을 세워 강 한가운데로 나오면서 다릿발을 세운다. 물이 깊고 물살이 세차 배를 고정시키기도 벅찬데 다릿발을 세우고 머그미를 씌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교각을 2m 간격으로 20m 쯤 세운 뒤 교각과 머그미 위에 길이가 약 4m되는 소나무를 걸쳐 놓으면 뼈대가 완성된다.
다리를 다 놓은 것과 마찬가지인 이 때 쯤이면 강 양쪽에서 소나무와 갈나무 가지를 열모 사이사이로 엇갈려 끼워오기 시작한다. 소나무와 갈나무 가지 끝이 양쪽으로 향하게 놓는 것은 강물 위로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다리를 지날 때 공포감을 덜게하기 위함이다. 섶 위에다가 흙을 깔아 다리가 완성되면 양쪽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최고 연장자를 앞세워 서로 마주보며 다리를 건너며 반가운 인사를 한다.
비록 겨울 삭풍을 견디고 이듬해 봄눈이 녹아 큰물이 내려오거나 여름 장마로 강물이 불어 떠내려갈 다리지만 두 마을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가깝게 이어놓은 것이다. 섶다리가 위용을 드러내면 마을 사람들은 농악의 장단에 맞춰 한바탕 마을 잔치를 벌인다. 감자밥과 칼국수에 메밀묵, 고들빼기 김치 등의 토속음식을 먹고 옥수수 막걸리 등을 마시며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빌었다.
섶다리를 재현하기 위해 지난 1997년에는 예미농협의 후원과 정선아리랑연구소의 고증으로 '정선 수동 섶다리놓기' 행사를 벌였으나 이후 댐 건설을 둘러싼 논란으로 중단되었다. 섶다리는 동강 유역의 전통적인 환경친화적인 다리로 전승 보전을 위해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다.
다리를 놓기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교각으로 쓰이는 다릿발 등의 나무를 한다. 이들 나무들의 이름 또한 특이한데, 다릿발을 연결해 고정시키는데 쓰이는 나무를 '머그미'라고 하며, 상판에 해당하는 길고 굵은 나무를 '열모'라고 한다.
섶다리를 놓는데는 먼저 배를 상류에 줄로 매어 놓고 Y자 형태의 다릿발을 먼저 세운다. 그리고 그 위에 길이가 약 1m 정도로 양쪽 끝에 홈을 판 머그미를 얹고 그 홈에다가 다릿발을 끼워 움직이지 않게 나무 쐐기를 박는다.
강을 낀 마을 사람들은 양쪽에서부터 교각을 세워 강 한가운데로 나오면서 다릿발을 세운다. 물이 깊고 물살이 세차 배를 고정시키기도 벅찬데 다릿발을 세우고 머그미를 씌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교각을 2m 간격으로 20m 쯤 세운 뒤 교각과 머그미 위에 길이가 약 4m되는 소나무를 걸쳐 놓으면 뼈대가 완성된다.
다리를 다 놓은 것과 마찬가지인 이 때 쯤이면 강 양쪽에서 소나무와 갈나무 가지를 열모 사이사이로 엇갈려 끼워오기 시작한다. 소나무와 갈나무 가지 끝이 양쪽으로 향하게 놓는 것은 강물 위로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다리를 지날 때 공포감을 덜게하기 위함이다. 섶 위에다가 흙을 깔아 다리가 완성되면 양쪽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최고 연장자를 앞세워 서로 마주보며 다리를 건너며 반가운 인사를 한다.
비록 겨울 삭풍을 견디고 이듬해 봄눈이 녹아 큰물이 내려오거나 여름 장마로 강물이 불어 떠내려갈 다리지만 두 마을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가깝게 이어놓은 것이다. 섶다리가 위용을 드러내면 마을 사람들은 농악의 장단에 맞춰 한바탕 마을 잔치를 벌인다. 감자밥과 칼국수에 메밀묵, 고들빼기 김치 등의 토속음식을 먹고 옥수수 막걸리 등을 마시며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빌었다.
섶다리를 재현하기 위해 지난 1997년에는 예미농협의 후원과 정선아리랑연구소의 고증으로 '정선 수동 섶다리놓기' 행사를 벌였으나 이후 댐 건설을 둘러싼 논란으로 중단되었다. 섶다리는 동강 유역의 전통적인 환경친화적인 다리로 전승 보전을 위해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다.
선사유적
신석기 유적
선군 신동읍 덕천리 소골 유적
덕천리 소골유적은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소골마을 북쪽 나리소에서 칠족령 아래로 굽이도는 동강변 퇴적지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소골 앞으로 흐르는 강은 물굽이가 커서 퇴적지대 또한 수천 평에 이르고 있는 곳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적들이 고루 분포되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덕천리 소골의 신석기유적은 1987년 국민대 박물관 조사단이 청동기시대의 유물을 조사하면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 1989년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면서 소골의 고인돌 4기와 함께 신석기시대 유물 상당수가 발굴 조사되었다.
소골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은 주로 빗살무늬토기와 석기 등으로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지금까지 소골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소골 남쪽 소골상회를 지나 커다란 밤나무 아래에 있는 고인돌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마을 주변 밭에는 아직도 무수한 토기조각들이 널려 있다.
현재의 소골유적은 안내표지판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어 환경과 문화를 접목한 교육장으로서의 보존 대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덕천리 소골의 신석기유적은 1987년 국민대 박물관 조사단이 청동기시대의 유물을 조사하면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 1989년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면서 소골의 고인돌 4기와 함께 신석기시대 유물 상당수가 발굴 조사되었다.
소골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은 주로 빗살무늬토기와 석기 등으로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지금까지 소골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소골 남쪽 소골상회를 지나 커다란 밤나무 아래에 있는 고인돌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마을 주변 밭에는 아직도 무수한 토기조각들이 널려 있다.
현재의 소골유적은 안내표지판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어 환경과 문화를 접목한 교육장으로서의 보존 대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고방마을 유적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고방마을 고방정뒤에 있는 유적이다.
고성산성이 있는 해발 435m의 동쪽 산자락이 끝나는 절벽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암벽 아래로는 길이 나 있었는 듯 폭 1.5m 정도로 평탄하게 이어져 있다.
암벽 아래에 마치 작은 동굴과 같이 입구가 파인 곳이 바위 밑 유적지다. 이곳에서 1997년 강릉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이 처음으로 빗살무늬토기 조각, 숫돌, 뼛조각, 조개껍질 등을 발굴 조사 한 바 있다.
고성 산성 입구에 있는 고방정은 오래전부터 인근 마을 어린아이들의 놀이터였으며, 정밀 지표조사가 되기 전인 1995년부터 고성산성제 행사 때 본행사와 함께 부녀자들이 탑쌓기놀이를 하면서 암벽 아래 유적지 일부가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 자연환경을 그대로 이용한 주거형태를 교육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이나 안내판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다.
고성산성이 있는 해발 435m의 동쪽 산자락이 끝나는 절벽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암벽 아래로는 길이 나 있었는 듯 폭 1.5m 정도로 평탄하게 이어져 있다.
암벽 아래에 마치 작은 동굴과 같이 입구가 파인 곳이 바위 밑 유적지다. 이곳에서 1997년 강릉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이 처음으로 빗살무늬토기 조각, 숫돌, 뼛조각, 조개껍질 등을 발굴 조사 한 바 있다.
고성 산성 입구에 있는 고방정은 오래전부터 인근 마을 어린아이들의 놀이터였으며, 정밀 지표조사가 되기 전인 1995년부터 고성산성제 행사 때 본행사와 함께 부녀자들이 탑쌓기놀이를 하면서 암벽 아래 유적지 일부가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 자연환경을 그대로 이용한 주거형태를 교육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이나 안내판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다.
청동기 유적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제장 고인돌 유적
제장은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소골마을과 강을 사이에 두고 남서쪽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양지바른 마을이다. 마을 뒤쪽으로는 백운산자락에서 가파르게 뻗어내린 칠족령이 완만한 경사로 흘러 내렸으며, 앞으로는 동강 물굽이가 완만하게 휘돌아 퇴적지형을 이루어 놓았다.
제장의 고인돌유적은 강에서 약 50m 떨어진 고추밭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길이 212cm 폭 123cm 두께 24cm의 덮개돌 위에는 길이가 각각 143cm, 108cm 폭 47cm, 66cm 두께 12cm, 13cm되는 판석 2개가 겹쳐쳐 있다. 이 판석들은 주변에 있던 것으로 밭을 경작하면서 밭 한가운데에 있던 것들을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제장의 고인돌유적은 강에서 약 50m 떨어진 고추밭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길이 212cm 폭 123cm 두께 24cm의 덮개돌 위에는 길이가 각각 143cm, 108cm 폭 47cm, 66cm 두께 12cm, 13cm되는 판석 2개가 겹쳐쳐 있다. 이 판석들은 주변에 있던 것으로 밭을 경작하면서 밭 한가운데에 있던 것들을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소골 유적
소골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된 곳과 같은 곳에 있다. 1989년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조사단이 집중 발굴한 유적으로 고인돌과 집터 일부를 정밀 조사했고, 골아가리구멍무늬토기조각, 구멍무늬토기조각, 석기 등 수많은 유물을 발굴한 바 있다.
소골의 청동기 시대 유적은 지금 옥수수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에서 지표 채집한 것으로, 길이 10cm 안팎의 돌도끼와 석기 등이다.
소골에서 조사된 고인돌은 모두 4기로 소골상회 북쪽 밤나무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밤나무 바로 아래에 있는 고인돌은 덮개돌 크기가 2m가 넘고 두께도 30cm가 넘는 큰 고인돌로 덮개돌위에는 10개 정도의 성혈이 드러나있다. 이 고인돌 아래에서는 민무늬토기조각, 붉은 간토기조각, 흙그물추, 숫돌조각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밤나무 밑 고인돌에서 서쪽으로 약 4m 지점 밭머리에는 3기의 고인돌이 몰려있다. 이곳에 있는 고인돌은 덮개돌의 크기가 밤나무 밑 고인돌보다는 작고 일부는 덮개돌이 조각나는 등 심하게 훼손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주변에는 고인돌로 보이는 여러개의 판석들이 널려 있는데, 밭을 경작하면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소골은 고인돌이 군락을 이루는 마을이자 동강유역에서 역사유적이 가장 풍부하게 남아있는 지역이다
소골에서 조사된 고인돌은 모두 4기로 소골상회 북쪽 밤나무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밤나무 바로 아래에 있는 고인돌은 덮개돌 크기가 2m가 넘고 두께도 30cm가 넘는 큰 고인돌로 덮개돌위에는 10개 정도의 성혈이 드러나있다. 이 고인돌 아래에서는 민무늬토기조각, 붉은 간토기조각, 흙그물추, 숫돌조각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밤나무 밑 고인돌에서 서쪽으로 약 4m 지점 밭머리에는 3기의 고인돌이 몰려있다. 이곳에 있는 고인돌은 덮개돌의 크기가 밤나무 밑 고인돌보다는 작고 일부는 덮개돌이 조각나는 등 심하게 훼손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주변에는 고인돌로 보이는 여러개의 판석들이 널려 있는데, 밭을 경작하면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소골은 고인돌이 군락을 이루는 마을이자 동강유역에서 역사유적이 가장 풍부하게 남아있는 지역이다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고인돌 유적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고성분교 뒤에 위치하고 있다. 고성리 고림에서 흘러 내리는 냇물 옆 고추밭에 큰 고인돌이 있고 남쪽으로 11m 거리에 작은 고인돌이 있다.
큰 고인돌은 둥그스레한 모습의 석회암을 덮개돌로 하고 있으며, 크기는 길이 263cm 폭 254cm 두께 67cm로 동강변에 있는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형태 또한 완전한 것으로 보인다.
덮개돌 위에는 스무곳이 넘는 성혈이 뚜렸하게 나 있으며 덮개돌 밑에는 서쪽 방향으로만 길이 163cm 두께 32cm의 받침돌이 있고 동편 받침돌은 없어지고 많은 주먹돌로 채워져 있다,
작은 고인돌은 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누운 상태로 석회암을 사용하였고 크기는 길이 210cm 폭 137cm 두께 58cm이다. 덮개돌 서쪽 면에는 많은 성혈이 나 있다.
1993년 강원의 얼 학술조사단에 의해 고인돌주변에서 돌화살촉 4점이 지표채집 되기도 했다.
고성리는 소골마을에서 약 1.3km 이격된 곳에 위치한 마을로 고성리산성, 소골 선사유적과 연계해 보호대책 마련과 산 교육장으로 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큰 고인돌은 둥그스레한 모습의 석회암을 덮개돌로 하고 있으며, 크기는 길이 263cm 폭 254cm 두께 67cm로 동강변에 있는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형태 또한 완전한 것으로 보인다.
덮개돌 위에는 스무곳이 넘는 성혈이 뚜렸하게 나 있으며 덮개돌 밑에는 서쪽 방향으로만 길이 163cm 두께 32cm의 받침돌이 있고 동편 받침돌은 없어지고 많은 주먹돌로 채워져 있다,
작은 고인돌은 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누운 상태로 석회암을 사용하였고 크기는 길이 210cm 폭 137cm 두께 58cm이다. 덮개돌 서쪽 면에는 많은 성혈이 나 있다.
1993년 강원의 얼 학술조사단에 의해 고인돌주변에서 돌화살촉 4점이 지표채집 되기도 했다.
고성리는 소골마을에서 약 1.3km 이격된 곳에 위치한 마을로 고성리산성, 소골 선사유적과 연계해 보호대책 마련과 산 교육장으로 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 납운돌 유적
납운돌의 청동기 유적지는 신석기 유적이 발굴된 곳과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장마로 인해 납운돌 위의 돈니치 쪽에서 흘러내린 냇물이 퇴적지를 흘러가면서 많은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채집한 유물로는 민무늬토기 밑동조각과 몸통조각, 돌창조각, 돌화살촉 몸통조각 등 다수이다.
밭 둑 경사면에는 길이 233cm 폭 1m 두께 50cm의 고인돌이 받침돌로 추정되는 길이 87cm 폭 110cm 두께 32cm의 판석과 함께 방치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고인돌은 밭 한가운데 있던 것으로 밭을 경작하면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운치리 납운돌의 유적지는 소골과 함께 동강변의 대표적인 청동기 유적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채집한 유물로는 민무늬토기 밑동조각과 몸통조각, 돌창조각, 돌화살촉 몸통조각 등 다수이다.
밭 둑 경사면에는 길이 233cm 폭 1m 두께 50cm의 고인돌이 받침돌로 추정되는 길이 87cm 폭 110cm 두께 32cm의 판석과 함께 방치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고인돌은 밭 한가운데 있던 것으로 밭을 경작하면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운치리 납운돌의 유적지는 소골과 함께 동강변의 대표적인 청동기 유적지이기도 하다.
정선군 정선읍 귤암리 고인돌 유적
정선군 정선읍 귤암리 귤하마을에는 모두 3기의 고인돌이 있다. 귤암리 귤하는 나팔봉(해발 693.4m)의 가파른 절벽 아래를 흐르는 조양강물에 의해 이루어진 하상 퇴적지대에 형성된 마을이다.
이곳의 고인돌은 가수리와 광하리로 이어지는 도로 아래 묘 옆에 1기가 있고,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 마을 농산물 집하창고 아래쪽 밤나무 옆에 1기가 있다. 또 하나는 밤나무 옆 고인돌에서 남쪽으로 약 300m지점 강변 풀밭에 있다.
도로 바로 아래에 있는 고인돌은 화강암으로 길이 273cm 폭 236cm, 두께 57cm이다.
밤나무 옆에 있는 고인돌은 길이 193cm 폭 120cm 두께 23cm로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으며, 덮개돌 중앙부에 직경 5cm 크기의 성혈이 나 있다. 강변 풀밭에 있는 고인돌은 길이 210cm 폭 183cm 두께 33cm로 동서 방향으로 놓여있다.
이곳의 고인돌은 가수리와 광하리로 이어지는 도로 아래 묘 옆에 1기가 있고,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 마을 농산물 집하창고 아래쪽 밤나무 옆에 1기가 있다. 또 하나는 밤나무 옆 고인돌에서 남쪽으로 약 300m지점 강변 풀밭에 있다.
도로 바로 아래에 있는 고인돌은 화강암으로 길이 273cm 폭 236cm, 두께 57cm이다.
밤나무 옆에 있는 고인돌은 길이 193cm 폭 120cm 두께 23cm로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으며, 덮개돌 중앙부에 직경 5cm 크기의 성혈이 나 있다. 강변 풀밭에 있는 고인돌은 길이 210cm 폭 183cm 두께 33cm로 동서 방향으로 놓여있다.
선사유적
철기유적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바새 적석총 유적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에서 물레재를 넘어 첫 마을인 덕천리 바새는 운치리에서 부터 이어지기 시작하는 감입사행천에 의해 형성된 마을로 물굽이가 감싸는 곳마다 퇴적지대가 형성되어 선사인들이 생활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바새마을 북쪽 퇴적지대 위 소나무 밭과 솔밭 사이에서 1995년 강릉대 박물관조사단에 의해 돌무지 무덤(積石塚)으로 보이는 높이 70cm∼2m, 직경 2m∼7m의 돌무지 6기가 조사되었다.
돌무지 유구는 모두 강변에서 옮겨온 듯한 둥근 주먹돌로 차분하게 쌓아놓아 안정감을 준다.
바새마을 북쪽 퇴적지대 위 소나무 밭과 솔밭 사이에서 1995년 강릉대 박물관조사단에 의해 돌무지 무덤(積石塚)으로 보이는 높이 70cm∼2m, 직경 2m∼7m의 돌무지 6기가 조사되었다.
돌무지 유구는 모두 강변에서 옮겨온 듯한 둥근 주먹돌로 차분하게 쌓아놓아 안정감을 준다.
정선군 정선읍 덕천리 제장유적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제장마을 고인돌이 있는 곳에서 남서쪽으로 약 400m 떨어진 백운산 자락 산사면에 돌무지 무덤(積石塚)으로 보이는 돌무지 1기가 위치하고 있다. 강가에서 주워온 주먹돌을 쌓아 동서 방향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게 만들었으며 직경 10. 2m 높이 2.2m에 이른다.
1993년 강원의 얼 학술조사단에 의해 돌무지 무덤과 함께 주변에서 적갈색 민무늬토기 조각 6점이 지표 채집 되었다.
1993년 강원의 얼 학술조사단에 의해 돌무지 무덤과 함께 주변에서 적갈색 민무늬토기 조각 6점이 지표 채집 되었다.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 수동유적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 수동 마을은 마을 위쪽 삼형제바위 아래서부터 휘도는 물굽이에 의해 퇴적된 곳에 형성된 마을이다. 백운산자락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강 건너편에는 번들 마을이 있다.
수동마을 나루터 바로 아래 강변 퇴적지에서 1995년 강릉대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바둑무늬가 찍힌 타날무늬토기조각과 돌그물추, 갈돌 등이 지표채집 되었다.
수동마을 나루터 바로 아래 강변 퇴적지에서 1995년 강릉대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바둑무늬가 찍힌 타날무늬토기조각과 돌그물추, 갈돌 등이 지표채집 되었다.
정선군 정선읍 가수리 뒷대벌유적
정선군 정선읍 가수리는 동강 최상류의 마을이다. 뒷대벌 마을은 조양강과 동남천이 만나 동강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귤암리 쪽에서 흐르는 조양강의 완만한 물굽이에 의해 강옆으로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퇴적지형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쪽 강변 퇴적지에서 1995년 강릉대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민무늬토기 조각, 타날무늬토기조각, 냇돌 등 많은 철기 시대 유물들이 조사되었다.
마을 앞쪽 강변 퇴적지에서 1995년 강릉대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민무늬토기 조각, 타날무늬토기조각, 냇돌 등 많은 철기 시대 유물들이 조사되었다.
삼국시대 유적
정선군 고성리 산성
고성리 산성은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고방마을 앞산에 있는 석축 산성으로 고방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20여분 정도 오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성이다.
성을 쌓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구려가 남진을 하면서 전초 기지나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요새로 추측된다.
5∼6 세기 경 고구려와 신라는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해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을 펼쳤는데, 고성을 끼고있는 지역은 영서지방의 평창에서 영남 지방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위치하고있어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한강상류를 따라 남하하면서 충북 영춘에 온달산성을 전진기지로 삼고 영월 뱃나들이의 대야리 산성, 정양리의 왕검성, 영월 삼옥리의 완택산성 등을 연결해 한수유역을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
해발 425m가 되는 산을 중심으로 띠를 두른 듯이 쌓은 테뫼형 산성인 이 성은 북쪽으로 약 80m의 성곽이 남아있고 동쪽과 서쪽은 이에 비해 외벽과 내벽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축조 방식은 장방형의 모가난 돌을 아래에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10∼15도 정도 기울여 쌓는 물림쌓기 방식으로 쌓았는데, 성을 연속해서 이어서 쌓지않고 가파른 곳에는 토축방식으로 다져놓고 중요한 곳은 석축으로 했다.
몇 년 전 까지만해도 성 안에서 밭을 일구다가 여러 개의 돌화살촉 등을 발견하기도 했다.
1993년부터 가까운 고성리·덕천리·운치리 주민들이 힘을 모아 고성산성제를 열어 성곽보존 운동을 펴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95년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 68호로 지정되었고, 주변과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무너진 부분 곳곳을 보수하는 혜택을 받기도 했다.
사시사철 산성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성 아래 고방, 소골, 제장 등지의 마을에는 신석기 유적에서부터 고인돌 등 청동기 유적도 널려있어 환경 탐사 및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고있는 곳이다.
성을 쌓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구려가 남진을 하면서 전초 기지나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요새로 추측된다.
5∼6 세기 경 고구려와 신라는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해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을 펼쳤는데, 고성을 끼고있는 지역은 영서지방의 평창에서 영남 지방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위치하고있어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한강상류를 따라 남하하면서 충북 영춘에 온달산성을 전진기지로 삼고 영월 뱃나들이의 대야리 산성, 정양리의 왕검성, 영월 삼옥리의 완택산성 등을 연결해 한수유역을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
해발 425m가 되는 산을 중심으로 띠를 두른 듯이 쌓은 테뫼형 산성인 이 성은 북쪽으로 약 80m의 성곽이 남아있고 동쪽과 서쪽은 이에 비해 외벽과 내벽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축조 방식은 장방형의 모가난 돌을 아래에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10∼15도 정도 기울여 쌓는 물림쌓기 방식으로 쌓았는데, 성을 연속해서 이어서 쌓지않고 가파른 곳에는 토축방식으로 다져놓고 중요한 곳은 석축으로 했다.
몇 년 전 까지만해도 성 안에서 밭을 일구다가 여러 개의 돌화살촉 등을 발견하기도 했다.
1993년부터 가까운 고성리·덕천리·운치리 주민들이 힘을 모아 고성산성제를 열어 성곽보존 운동을 펴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95년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 68호로 지정되었고, 주변과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무너진 부분 곳곳을 보수하는 혜택을 받기도 했다.
사시사철 산성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성 아래 고방, 소골, 제장 등지의 마을에는 신석기 유적에서부터 고인돌 등 청동기 유적도 널려있어 환경 탐사 및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고있는 곳이다.
영월군 완택산성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에 위치한 완택산성은 삼옥리 먹골이나 작골에서 능선을 타고 올라갈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성안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 오르면 동강 상·하류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이점 때문에 이곳에다 성을 축성하였다고 추정된다. 이 성은 험준한 지형 지세를 이용하여 성토법과 보축법을 이용한 토성 및 석성 축조법이 혼합된 양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성곽이 많이 훼손되어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남문지인 연하리 꽃밭머리 쪽으로는 돌을 이용하여 개거식 성문을 만들고 그 위에는 기와를 얹은 누문(樓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지금도 이곳 완택산성 남문지에는 무너진 돌틈 사이로 많은 기왓장들이 채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문터들은 성의 규모가 워낙 넓어서 그 위치를 찾을 수가 없으며, 동쪽 능선에는 동강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장대지(長臺址)로 추측되는 곳이 있다. 성내에서 가장 넓고 평지인 곳에는 우물터가 있으나 건물지나 뚜렷한 유물들이 채집되지 않고 있다.
완택산성은 능선을 적절히 이용한 산성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莞澤山古城石築 周三千四百七十七尺 三面石壁諺傳 哈丹入避難干此.., 완택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477척이다.
3면이 석벽인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합단이 침입했을 대 고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피난을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합단은 몽골의 반적으로 징키스칸의 후손이다.
이곳에 오르면 동강 상·하류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이점 때문에 이곳에다 성을 축성하였다고 추정된다. 이 성은 험준한 지형 지세를 이용하여 성토법과 보축법을 이용한 토성 및 석성 축조법이 혼합된 양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성곽이 많이 훼손되어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남문지인 연하리 꽃밭머리 쪽으로는 돌을 이용하여 개거식 성문을 만들고 그 위에는 기와를 얹은 누문(樓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지금도 이곳 완택산성 남문지에는 무너진 돌틈 사이로 많은 기왓장들이 채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문터들은 성의 규모가 워낙 넓어서 그 위치를 찾을 수가 없으며, 동쪽 능선에는 동강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장대지(長臺址)로 추측되는 곳이 있다. 성내에서 가장 넓고 평지인 곳에는 우물터가 있으나 건물지나 뚜렷한 유물들이 채집되지 않고 있다.
완택산성은 능선을 적절히 이용한 산성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莞澤山古城石築 周三千四百七十七尺 三面石壁諺傳 哈丹入避難干此.., 완택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477척이다.
3면이 석벽인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합단이 침입했을 대 고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피난을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합단은 몽골의 반적으로 징키스칸의 후손이다.
어라연(魚羅淵)
어라연은 동강의 하류인 영월읍 거운리에 위치하고 있다. 어라연은 일명 삼선암(三仙岩)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선인들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고 하여 정자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강의 상부, 중부, 하부에 3곳의 소(沼)가 형성되어 있고 그 소의 한 가운데에 옥순봉(玉筍峯)을 중심으로 세 개의 봉우리가 물속에서 솟아있는 형태이다.
푸르른 물속에서 솟아 오른 듯한 기암괴석은 주변의 계곡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감상하는 느낌마저 주는 곳이다. 바위 틈새로 솟은 소나무와 다양한 풀들은 맑은 물소리와 어우러져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모습에 비유되기도 한다.
1530년(중종 25년)에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세종 13년 어라연에 큰 뱀이 나타나 연못에서 놀기도 하고 물가를 꿈틀대며 기어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하루는 물가의 돌무더기 위에 허물을 벗어 놓았는데, 길이가 수 십 척이고 비늘은 동전만하고 두 귀가 있엇다고 한다.
이 곳 사람들이 비늘을 주워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권극화(權克和)라는 사람을 보내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권극화가 어라연에 당도해 연못 한 가운데 배를 띄우자 갑자기 폭풍이 일어 배를 삼켜 버리고, 그 때 부터 뱀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 어라연 근처에는 어라사(於羅寺)라는 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영월 읍내에서 약 35리 정도 떨어진 어라연은 길이 험해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웠으나, 몇 년 전 부터 널리 알려지면서 여름철이면 낚시꾼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정선 신동읍 운치리 강변에서부터 래프팅으로 동강 물길을 따라 내려가던 사람들과 트레킹 인파가 찾아들면서 훼손이 심해 출입을 통제할 만큼 몸살을 앓고 있는 곳이다.
강의 상부, 중부, 하부에 3곳의 소(沼)가 형성되어 있고 그 소의 한 가운데에 옥순봉(玉筍峯)을 중심으로 세 개의 봉우리가 물속에서 솟아있는 형태이다.
푸르른 물속에서 솟아 오른 듯한 기암괴석은 주변의 계곡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감상하는 느낌마저 주는 곳이다. 바위 틈새로 솟은 소나무와 다양한 풀들은 맑은 물소리와 어우러져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모습에 비유되기도 한다.
1530년(중종 25년)에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세종 13년 어라연에 큰 뱀이 나타나 연못에서 놀기도 하고 물가를 꿈틀대며 기어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하루는 물가의 돌무더기 위에 허물을 벗어 놓았는데, 길이가 수 십 척이고 비늘은 동전만하고 두 귀가 있엇다고 한다.
이 곳 사람들이 비늘을 주워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권극화(權克和)라는 사람을 보내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권극화가 어라연에 당도해 연못 한 가운데 배를 띄우자 갑자기 폭풍이 일어 배를 삼켜 버리고, 그 때 부터 뱀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 어라연 근처에는 어라사(於羅寺)라는 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영월 읍내에서 약 35리 정도 떨어진 어라연은 길이 험해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웠으나, 몇 년 전 부터 널리 알려지면서 여름철이면 낚시꾼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정선 신동읍 운치리 강변에서부터 래프팅으로 동강 물길을 따라 내려가던 사람들과 트레킹 인파가 찾아들면서 훼손이 심해 출입을 통제할 만큼 몸살을 앓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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